창빈 안씨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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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빈 안씨 묘역은 조선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의 묘역이다. 1550년 경기도 양주 장흥리에 조성되었다가 이듬해 과천 동작리로 이장되었으며, '동작릉'으로 불렸다. 묘소는 담장, 묘갈, 석등, 석인상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683년 숙종의 명으로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1956년 국립서울현충원이 건립되면서 묘역은 국립서울현충원 내부에 위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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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이제 묘역은 조선 태종의 장남이자 폐세자인 양녕대군 이제의 묘소와 사당인 지덕사를 포함하며, 숭례문 현판 글씨를 썼고, 지덕사에는 양녕대군과 부인의 위패가 있으며, 이승만이 그의 16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창빈 안씨 묘역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창빈 안씨 묘역 |
로마자 표기 | Changbin Anssi Myoyeok |
유형 | 유형문화재 |
지정 번호 | 54 |
지정일 | 1983년 11월 11일 |
시대 | 조선시대 1683년 (조선 숙종 9년) |
소유 | 전주 이씨 덕흥대원군파 |
면적 | 토지 414.3m² |
수량 | 분묘 1기, 석물 1기 |
위치 | |
주소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299-10 국립서울현충원 |
좌표 | 37°29′49″N 126°58′13″E |
기타 | |
참고 | 국립서울현충원 |
문화재청 ID | 21,00540000,11 |
2. 생애
창빈 안씨는 안산 안씨로, 아버지 안탄대는 중종반정 이후 원종공신에 책록되어 적순부위를 지냈고,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황씨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1499년(연산군 5년) 7월 9일에 태어나 1549년(명종 4년) 10월 13일 51세로 사망했다.
1544년 중종 사후 생애는 "중종 사후", "사망"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룬다.
2. 1. 입궁과 승은
1499년(연산군 5년) 7월 9일에 태어난 창빈 안씨는 아홉 살 때인 1507년(중종 2) 궁녀로 입궁하여 정현왕후의 보살핌을 받았다. 1518년(중종 13년) 왕의 총애를 받았고, 22세에 상궁, 31세에 숙원이 되었으며, 42세에 숙용에까지 올랐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영양군, 덕흥대원군, 정신옹주 등 2남 1녀를 두었다.2. 2. 왕자녀 생산
중종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영양군(永陽君), 둘째는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외동딸은 정신옹주(靜愼翁主)이다.2. 3. 중종 사후
1544년 중종이 사망하자 창빈 안씨는 전례에 따라 인수궁(仁壽宮)으로 물러나 거처하기를 청하였으나, 문정왕후의 특별 명령으로 궁에 머물렀다. 1549년(명종 4년) 친정에 나갔다가 10월 13일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568년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선조)이 조선 제14대 임금으로 즉위하자, 1577년(선조 10년) 창빈 안씨는 창빈(昌嬪)으로 추봉되었고 덕흥대원군의 사당(덕흥궁)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2. 4. 사망
1544년 중종이 사망하자 창빈 안씨는 전례에 따라 인수궁(仁壽宮)으로 물러나 거처하기를 청하였으나, 문정왕후의 특명으로 궁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1549년(명종 4년) 우연히 친정에 나갔다가 10월 13일 51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묘소는 1550년 3월 8일 경기도 양주(楊州) 서쪽 장흥리(長興里)에 장례 지냈으나, 이듬해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인 과천(果川) 북면(北面) 동작리(銅雀里) 언덕으로 이장했다. 이때부터 '동작릉(銅雀陵)'이라 불리었다.3. 사후
1544년 중종이 사망하자 창빈 안씨는 전례에 따라 인수궁으로 물러나 거처하기를 청하였으나, 문정왕후의 특별 명령으로 궁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1549년(명종 4년) 우연히 친정에 나갔다가 10월 13일 51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3. 1. 추봉
1568년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이 조선 제14대 임금(선조)으로 즉위하자 1577년(선조 10년)에 창빈(昌嬪)으로 추봉되었고, 덕흥대원군의 사당에 향사되었다.3. 2. 묘소와 신도비
1549년(명종 4년) 창빈 안씨가 사망하자, 1550년 3월 8일 경기도 양주(楊州) 서쪽 장흥리(長興里)에 묘소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지금의 자리인 과천(果川) 북면(北面) 동작리(銅雀里) 언덕으로 이장했다. 그때부터 '동작릉(銅雀陵)'이라 불리었다. 이후 아들 영양군 이거가 죽자 그의 묘 오른쪽 언덕에 안장하였으나, 1581년 2월 26일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沙是里) 마을 후록 인좌원(後麓寅坐原)으로 이장되었다. 현재 묘소에는 담장이 둘려져 있고 묘 앞에는 묘갈, 석등, 석인상 2기가 세워져 있다.숙종은 창빈 안씨가 서거한 지 130여 년이 지나도록 묘도(墓道)에 비석이 없음을 걱정하여 1683년(숙종 9) 12월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신도비는 묘소의 서쪽 비탈 10여 m쯤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다. 비의 형식은 후궁의 묘에서 찾아보기 드문 예로서 정사각형을 기본으로 했다. 대좌(臺座)·비신(碑身)·개석(蓋石)으로 구성되는데, 정사각형의 2단 대좌는 장중한 느낌을 준다. 비신도 사각기둥 모양이며, 개석 또한 4각 지붕 모양으로 꼭대기에 연꽃봉우리를 크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비문은 예조판서 신정(申晸, 1628∼1687)이 지었고, 글씨는 판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으며 머리전서[頭篆]는 오위도총부 도총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썼다.
3. 3. 국립서울현충원
1956년 국립서울현충원이 창빈 안씨 묘역 터에 건립되면서, 창빈 안씨의 묘역은 국립서울현충원 내부에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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